평행선parallel lines
하늘을 향해 뻗은 두 팔이 있다. 젓가락에 빗댈 만큼 가는 팔의 주인공 치고는 썩 역동적인 모양이었다. 평범히 기지개를 켜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코트 안으로 말려들어간 셔츠 소매를 당겨올리기 위해서였는데, 그 치고 요란한 몸짓인 이유는 품 안에서 두 손목을 교차하는 것만으로도 어렵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난스러운 움직임은 그 날의 마음가짐이 유독 자유나 해방과도 맞물려 있었던 까닭이다. 그 팔은 1년 전까지만 해도 짝이 맞지 않았다.
10월 하순은 서리가 얼기엔 다소 이른 시기지만 얇은 코트 하나만으로 족할 기온도 아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옮겨 붙을 열이 있다면 코트자락으로도 간단히 이겨낼 수 있는 추위라는 뜻이었다. 나서기 전부터 잔뜩 장작을 그러모은 소년은 제 마음이 얼마나 부풀어 있는지 가늠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추위에 깎이는 몸에도 돌이키지 않는 걸음이 그랬다.
사과나무의 꽃이 지난 해보다 일찍 맺혔다고 한다. 의사는 관절이 붙는 것에 족히 12주는 걸릴 것이란 진단을 내놨지만, 예상과는 달리 한 자릿수를 벗어나는 주에 붕대를 풀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졸로프트나 팩실의 쓴맛 따위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다. 구역질하듯 혼자만의 위로를 서면 위로 끌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이제는….
“일라이. 많이 기다렸어?”
세일럼의 목소리였다. 알카이네의 조금 덜 마른 머리카락 끝에 붙은 고드름이 떨어졌다. 놀란 마음에 다급히 고개를 돌린 탓일 수도 있겠고, 그 목소리가 퍽이나 뜨겁고 다정해서라는 이유도 있겠다. 알카이네는 세일럼이 이름을 불러줄 때면 늘 그런 기분을 느끼곤 했는데, 자신이 거짓말 하나로 바꿔먹은 것치고는 제법 달콤했다는 걸 그도 알았을지도 모른다. 알카이네는 곧 자잘한 상념들이 꽉찬 욕조의 배수구를 연 것처럼 저편으로 흘러감을 느꼈다. 호기롭게 뻗었던 팔과는 달리 목소리에는 숫기가 없었다. 그래도 그 점을 지적 받지 않은 것은 미리 띄워둔 미소 탓일 것이다.
“사과는 때 늦으면 색이 바래기도 하잖아.”
“내가 그렇게 성급하지 않다는 것도 알지.”
알카이네는 조금 소리내 웃고 말았다. 그 말대로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시간은 실온에 오래 방치한 사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1년은 퇴색되기보다는 소생하기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해묵은 석고 붕대를 갈라도 악취는 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두 시선이 교차할 때 피어올랐다. 몇 번 손가락이 서로의 손갈퀴를 헤맸지만 서투름보다는 반색하는 장난에 가까웠다. 깍지는 금방 얽혔다.
알카이네와 세일럼은 천천히 수목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세일럼의 권유로, 담담한 재회는 의외로 과수원에서 이루어졌다. 다소 뜬금없을 수도 있는 장소를 걸고 넘어지지 않은 것은, 달리 그의 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이었다. 수확을 앞둔 과수원은 마치 생명력을 길어 그린 한 폭의 점묘화 같았다. 유독 싱그러운 내음은 비단 알카이네 자신이 기민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인데, 그러니까 관념적으로 이 땅에는 사과의 뿌리만 심겨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상기할 때면 잠시 미간을 좁힐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 곳이 문을 열었구나.”
심상한 투였다. 알카이네는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 존재할 줄로만 알았던 장소가 눈 앞에 재현된 것이 상당히 낯설었다. 모금으로 과수원을 세우자는 제안을 터무니 없이 여겼던 시기도 있었기 때문이고. 열린 과실의 갯수 만큼이나 물음의 가짓수도 늘어났다.
“네가 기억하는 방식은 그랬었나.”
“부고가 나를 돌아보게 했지. 결심에는 다른 이유가 있기도 했어.”
“이를 테면?”
“네가 세상으로 발돋움한 계기였잖아, 이 과수원은. 꼭 너와 마음을 나눠서만은 아니고….”
알카이네는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깍지를 죄여오는 것은 세일럼이 아니었다. 굳게 쥐는 것은 알카이네가 숱하게 감정을 억누를 때의 습관이었다. 그걸 눈치 챈 세일럼은 엄지로 알카이네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 괜찮다’ 라고 말하는 양. 알카이네가 우뚝 멈춰서는 바람에 세일럼은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알카이네는 퍽 조숙하게끔 느껴지는 그의 말투를 귀에 담았다.
“형을 떠나보낸 만큼 내가 네 등을 밀어줄 수 있었으면 했어. 어쩌면 욕심이지."
“네 마음은 충분히 달랠 수 있었다니 다행인데.”
“누구처럼 심약한 사내는 아니라.”
“나도 약을 처방받지 않은 건 꽤 됐거든….”
“그냥 네 작품을 더 보고 싶다는 뜻이야.”
—그러니 더는 혼자가 될 결심은 하지 말아, 그렇게 덧붙이며 세일럼은 위로 손을 뻗었다. 머리맡에 달린 열매를 따는 데에 발꿈치까지 들 필요는 없었다. 또, 그냥 베어물었을 때의 따끔한 눈초리를 걱정해 알카이네에게 손수건을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카이네는 새삼 그의 손에 쥐인 열매를 보고선 마주 잡은 손의 무게를 실감했다. 조금은 투박하게 느껴졌어도, 그 일련의 행동은 충분히 제 낭만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노력으로 다가왔다.
“이 사과는 선과 악을 가르는 대신 우리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해 줄거야. 그러니 이젠 땅을 보며 걷지마…”
공동과空胴果 ─
“들어가도 돼?”
알카이네는 암스포커가 자신의 집에 발을 들여놓을 때 이렇게 묻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열쇠를 문 실린더가 잘그락거리며 돌아가더니 경첩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두 발이 무딘 소리를 내며 차례로 카펫 위를 올라 디뎠다. 알카이네는 소스라치지 않았다. 그것은 더는 형형하고 사나운 군홧발 소리가 아니었다. 옥죄일 수 있는 마음을 언젠가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 와서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았다. 알카이네는 눈을 슴벅이며 스패출러를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지금 이곳에 있는 자신일지도 몰랐다.
귀환인은 카펫 위에서 착, 착, 착 하고 발을 끌더니 잠시간 모든 대기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곧 침음과 동시에 조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리로 휘둘러 찬 것 같은 현관문이 조금 야만스럽게 닫히고서야 알카이네는 고개를 들었다. 아일랜드 조리대 너머로 식료품이 정수리 높이까지 쌓인 종이봉투를 떠안은 암스포커가 보였다. 공교롭게도 학교에 질리도록 떠들썩한 성씨와 같았다.
그러나 애석해하기에는 알카이네 본인의 신세가 더욱 기구했다. 알카이네는 손에 든 것을 반죽에 꽂아두고 그를 도우러 갔다. 베티 크로커의 쿠키 믹스 상자가 암스포커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상자와 더불어 밀가루 포대를 자신의 품으로 옮기고서야 그와 마주 볼 수 있었다. 알카이네는 언제나 그가 그의 손위 형제보다 대하기 편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미소만을 두고 내리는 판단은 아니었다.
아주 많은 사고의 정차지를 생략한 후….
“네 아버지도 참….”
“…후! 네가 네 명은 족히 먹고도 남을 과자를 만든다길래.”
“밀가루는 충분하다는 보고는 듣지 못했어?”
“ ‘그 애를 생각해서 충분히 살 것’, 이게 전부였어.”
암스포커는 봉투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쉬는 대신 주방의 소동 주변에서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일면이 바로. 그의 형은 주방에 발을 들여놓을 시간에 제 스키니진의 통을 조금이라도 더 조이기에 바쁠 것 같았으니까. 알카이네 자신이 보는 큰 암스포커는, 좀처럼 타인을 위해 자기 다리를 움직이지 않는 자유로운 망아지였다. 그의 부산스러운 편자는 언제나 크고 작은 반향을 일으켰고, 교정을 휘저으며 떠오르는 빛의 꽁무니를 언제나 여러 그림자가 따랐다. 그러나 알카이네는 이 지극히 개인적인 비유가 그가 오후 두 시의 해처럼 커리어의 정점에 걸리기도 전에 비운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알카이네가 그와 둘도 없는 친구로서 소문이 나게 된 일과도 전혀.
“그곳에 놓아둬. 손도 덜 녹았을 텐데….”
“만드는 걸 도와줄 생각인데? 방해가 될 것 같으면 옆에서 조용히 구경이나 하지.”
알카이네는 다시금, 정말로 친구가 된다면 이쪽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또한 둘째 암스포커에게 요사夭死의 멍에를 지게 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알카이네는 조금 웃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고.”
“그래. 무엇보다 따뜻함이 필요한 사람끼리 함께 움직이며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카이네는 암스포커가 이럴 때마다 돌연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을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그들의 부재와 모든 것을 엮어 사고한다. 우발적으로, 성급하게. 살아온 나날보다 살아갈 나날이 더 많은 사람의 부재는 ‘at least'라는 서두로 위로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기에 그렇다. 그리고 알카이네 본인은 누구보다 그 사우다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어린 나이에 젊은 어머니를 잃었다. 조금은 야속한 것은, 지금의 암스포커를 위로하는 자신만큼 자신을 위로할 사람이 자신이 힘들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야속함이 고개를 드는 것을 버겁게 할 때쯤 알카이네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했다. 이어서는 속죄 이전에 맛볼 수 있는 과실의 달콤함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얼굴을 숨기는 대신 싱크대에 느른하게 기대었다. 어느새 재킷을 벗고 팔을 걷어붙인 암스포커가 손을 씻고자 가까이 왔다. 알카이네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 원만한 과수였다. 그의 나무는 결과지가 낮고 수피가 부드럽다. 손만 뻗으면 무엇이라도 수확할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손을 뻗은 것은 암스포커였다. 손이 이마를 건드리자 물기가 남은 손에서 사과 향 물비누 냄새가 났다.
“일라이, 우리 형에게도 과자를 만들어준 적이 있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실은 조금 맥이 풀린 탓에 알카이네는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 지 두뇌를 굴리는 일에는 열 여섯 년 평생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러나 피붙이가 아닌 타인에게 자신의 강점을 선보이는 일은 이들 가족에게가 가히 처음이었다.
“그건… 없어. 즈가리야는 식단 관리에 열중했으니까. 그보다 그의 취향을 만족시킬 자신이 없어서겠지.”
“그래? 난 둘의 취향이 조금 통하는 줄만 알았는데. 둘 다 옷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니까.”
“범위가 너무 넓은 거 아닌가. 아무래도 그는 조금이라도 특별함이 부족한 대상에게는 신경을 쏟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뱉은 말의 행간에서 포기의 뉘앙스를 읽은 알카이네는, 조금 더 보강하기로 했다.
“그래서 스테인드글라스 쿠키를 만드는 법을 연습하려고 했어.”
그리고 방치해둔 반죽 곁으로 나아가며 곁눈으로 암스포커의 눈치를 살폈다. 사회 진출이 요원한 주니어로서도, 암스포커의 얼굴이 안건을 보고받는 회사원의 것과 퍽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 집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고 느꼈지만 동시에 그의 아버지가 기업인임을 떠올려냈다. 외동인 그로서는 더더욱 둘 중 누가 가문의 이단아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나 다른데도 더없이 아끼는구나, 그런 감상이 들 뿐이었다.
“형이 너를 좋아했던 이유를 알겠다.”
이어지는 암스포커의 말은 생경한 감촉을 지녔다. 예상치 못한 두둔이었다. 알카이네는 문득 멈추어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건 무슨 뜻이야?”
“넌 정말이지 특별한 사람 같아.”
암스포커가 다음 문장을 발음하고자 입술을 조금 열었을 때 알카이네는 그를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제지했다.
“즈가리야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같은 말은 하지 말아 줘.”
암스포커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는 양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였다.
“잠깐만, 그게 아니야. 그래서야 이미 전개한 논리를 반대로 뒤집는 꼴이잖아.”
“네가 수학 과학에서 선두인 건 익히 들어 안다만, 이번 건 좀 서툴게 사용한 예시 같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면서. 여하튼 넌 내게는 없는 재주가 여럿 있으니까. 사람들은 보통 자신과 다른 사람을 특별하게 바라보거든. 화학을 하는 애가 감각에 조예가 있다니 대단해. 형이 네 추모사로 편히 잠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즈음 알카이네는 암스포커의 상의에 인쇄된 미감이 전무한 프린트를 눈에 담았다. 숨죽여 웃었으나 상대는 눈치챈 듯 옷의 목 언저리를 들었다 놓았다. 그는 자신의 집을 찾은 타인을 멋쩍게 할 만큼 이기적인 인사가 아니었고, 단지 친구를 대하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알카이네는 여태껏 자신이 창작자를 꿈꾼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보인 적 없는 폐쇄적인 세계를 누군가가 들여다보는 것은 나쁜 경험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희뿌윰한 과피 너머를 들여다볼 수 없음을 알았기에, 더욱 그랬다.
알카이네는 돌차간에 생각했다. 내가 그를 입학과 동시에 만났더라면. 그에게서 성마른 그의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재난을 예지하는 짐승처럼 암스포커의 장자를 피해 몸을 낮출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까. 그의 다음 발화는 갈망과 회한이 스며들어 조금 축축할 것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암스포커는, 물이 담겨 있던 그릇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알카이네는 부러 어조를 단단히 벼려내지 않은 채, 친구를 잃은 자의 무기력을 빙자하며 공허한 마음을 흘려보낸다.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낭독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자신은 어느새 양손을 모으고 있다. 암스포커의 손이 그 위로 공평히 얹혔다. 알카이네는 충분히 알았다. 다음 수순 그는 자신을 격려할 것이다. 그러나 실지 필요한 것은 대행자로서 자신이 적합한지에 대한 확신이 아니었다.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일라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과연 예상대로였다.
“더 해주고 싶은 말은 없는지 궁금하네.”
“내가 좀 서투르군. 글쎄… 충분한 용기를 줄 수 있을 만큼, 내가 네 믿을 만한 친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그가 성큼 거리를 좁힌다. 충분한가, 알카이네는 먼저 자신에게 묻는다. 이다음 목소리는 더욱 단단하게 발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당신의 완전한 호의를 수확해 그것을 싹틔울 용기가 자신에게는 부족했으므로.
“어떨까, 네 형보다 더 친해진다면 그가 용납하지 않을 텐데. 적어도at least,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
“나도 그래. 너를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암스포커가 눈을 감고 웃는다. 그는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들으면서도 조금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오늘 함께 보낸 시간 덕에 내일이면 학교에서 더욱 살갑게 말을 붙일 것이다. 거두어진 손은 이제는 쿠키 틀을 조리대 위에 쏟아내어 세심하게 고르고 있다. 알카이네는 그곳에 조금 시선을 두다가, 반죽을 다시 휘젓기 시작한다.
𓇣
알카이네는 언젠가 자신의 안에 숨기고 있던 칼날이 과육을 도려내고 안으로부터 밖으로 솟구쳐 나와, 두 진실한 씨앗의 자리를 거짓과 이기심이 대신하고 있음이 탄로나고 만다면, 당신이 여전히 우정의 이름 아래 그것을 땅에 심고 물을 뿌려줄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씨앗이 없는 과실은 땅에 묻어도 부패할 뿐 떡잎을 내지 못한다. 그러고는 조금도 특별해지지 못한 채 지상의 분분한 흙으로 되돌아간다. 잔인하리만치 명백하게 해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였다.
팔을 움직이던 알카이네는 지금까지 탐독해 온 책에서 우물의 물을 모두 길어내어 그곳을 무덤으로 삼은 치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지 생각했다. 질문의 끝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름이 남았다. 그는 지금도 영속하는 속죄의 행로를 걷고 있을 그들의 이름을 묵음하며, 힘차게 저어 단단해진 반죽에 설탕을 정량보다 많이 넣었다. 만들어낸 과자를 입 속에 넣고 또 넣어도 혓바닥이 씁쓸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