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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노트르담

Notre Dame de Paris (원제: The Hunchback of Notre D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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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90분

뮤지컬 · 로맨스 · 가족 · 역사

15세기, 아름다운 도시 파리의 중심은 누가 뭐라 해도 노트르담 대성당. 어느날, 대성당의 종소리에 맞추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흐르던 이 도시에 냉철하기로 소문난 이단심문관 오르한 파데예프 부주교가 부임해 온다. 그러나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한데 뒤섞이는 '미치광이들의 축제'날, 부주교는 어떤 젊은 집시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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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est foutu le temps des cathédrales

La foule des barbares

Est aux portes de la ville

Laissez entrer ces païens, ces vandales

 

 

 

 

 

대성당의 문이 활짝 열렸다. 성당의 위용에 알맞을 만큼 커다란 입구로, 사람들이 끝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일곱바퀴를 돌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발걸음과 목소리는 돌벽을 무너뜨릴 만큼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부주교님, 폭도들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병사가 황급히 보고를 시작했으나, 오르한은 손을 들어 이를 제지했다. 필요 없는 보고였기 때문이다. 보고는 이미 늦었고, 군중들은 너무 빠르게 성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의 무리는 일관성 조차 가지지 않았다. 넝마주의가 지나가는가 하면, 제법 단정하게 매무새를 갖춘 상인이 달음질쳐 멀어졌다. 누군가는 낯선 언어로 노래하는가 하면, 어떤 이가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는 음률은 도시에서 아주 오랫동안 전해내려온 것이기도 했다. 오르한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귀가 먹먹해지는 소음 안에서 그 단어들은 오르한 자신조차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대답 또한 있을리가 없었다.

---- !

성스러운 스테인드 글라스는 유리가 깨어지는 소리가 아닌 빈 창틀을 통해 들어오는 석양의 줄기로 그 부재를 알렸다. 부주교는 머릿속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그 붉고 따뜻한 노을을, 더하여 스산한 저녁의 바람을 정면으로 느껴야 했다. 그는 최대한 명징한 정신으로 폭도들의 세력을 직시하려 했다. 이 도시의 부주교로서, 이단심문관으로서 오르한 파데예프는 수십명의 머리꼭지를 내려다 보는 것에 이골이 나 있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정확했고, 주께서 비추신 광명에 따라 어린양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해 낼 수 있어왔다. 

그러나 성당을 가득 채운 석양은, 그 불길한 빛의 바다에서 펄떡대는 인간들중 양순한 백성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광인들의 축제와 기적의 궁전에서는 그렇게나 확연하게 알 수 있었던 이교도들이 평범한 도시의 사람들과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목동은 돌팔매를 쥐었으나, 석양을 등지고 쇄도해 오는 개와 늑대들을 구분하지 못하였다.

어느새 가장 안쪽까지 몰려온 사람들이 부주교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머리 한개 반 정도 큰 오르한에게 겁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고, 발길질을 해 댔다. 어느정도 군인의 훈련을 몸에 받든 이단심문관은 날붙이도 아닌 공격을 거침없이 받아칠 수 있었으나 이대로 가면 물소떼에 짓밟히듯 휘말리게 되는 미래가 뻔했다. 데려온 병사들은 이미 그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부주교는 허리를 숙이고 은밀하게 응달진 구석의 계단으로 서둘러 올라갔던 것이다.

 

종지기가 자리를 비웠는지 종탑 위는 얀과 오르한, 두 사람 밖에 서 있지 않았다. 종을 울리기 위해 늘어진 줄을 타고 서늘한 공기와 뜨거운 함성이 한줌씩 흘러들어왔다. 얀은 웃고 있었다. 폭도들이 들이닥치기 전, 성당 안을 채우던 그 메아리 만으로 오르한과 대화했을 때부터 분명 이 집시는 웃고있었으리라, 오르한은 짐작했다.

“성당의 문이 활짝 열리니, 이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었군요. 평소에는 짐작도 못했을 풍경이에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르한이 여전히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응수했다. 그러나 얀은 바위 같은 얼굴의 힘줄이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것을 쉬이 볼 수 있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을 모두 멸망으로 인도할 셈인가요, 부주교님?”

“저는 당신이 문을 잡아 벌렸다고 짐작합니다만.”

“저는 그제부터 내내 이곳에만 있었는데요.”

“무리의 선두에서 클로팽을 보았습니다.”

기적의 궁전에서 자신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던 자의 얼굴이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었다. 클로팽은 언제나 도시에 몰려다니는 집시 무리의 중심에 있었고, 그들만의 법칙을 관리하며 집행하는 자이기도 했다. 눈 앞의 남자가 친근하며 천진한 미소로 그와 대화하는 광경이 여전히 오르한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당신 이교도들은 이 도시에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양 백 마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가 아흔아홉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그 양을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쾅!

 

간신히 오르한의 주먹을 빗겨 맞은 얀이 반동으로 몸을 휘청였다. 균형을 잃은 눈 먼 몸짓에 볼품 없이 굴러다니던 가고일의 조각들이 넘어져 큰 소리를 냈다.

“……”

부주교의 주먹에서도 붉은 선혈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짧은 사이에 상대의 살을 가른 작은 날붙이를, 얀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털어냈다. 춤을 추고, 꽃을 뿌리던 손은 익숙하게 칼을 다루었다. 성직자는 그 사실을 말없이 곱씹었다. 이것은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의미로 짐승이 휘두르는 발톱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막연히 깨닫는다. 급작스런 망연함을 느낀 오르한은 피가 흐르는 손바닥과 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니, 시시각각 천천히 석양이 사그라들고 푸른 어둠이 종탑의 그림자 틈새로 흘러들자 순간 제 손도, 상대의 명확한 모양도 가늠할 수 없게 된다. 문자 그대로의 미지. 오르한은 광야를 헤매이는 심정으로 앞을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습니다, 얀 미치슬라브. 지금까지의 이교의 삶을 청산하고 세례를 받아 주님의 울타리 안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돌아가다니요, 부주교님.”

얀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는 애초부터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걸요.”

 

 

 

*

 

 

 

푸른 하늘에 양떼같은 구름이 구태의연하게 터를 잡은 오후였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 남루한 옷차림의 인간 둘이 흙바닥 위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두운 색의 수도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나머지 하나의 멱살을 잡아다가 물흐르는듯한 동작으로 바닥에 메다꽂는다. 곧, 세 명분의 신음소리와 욕설이 그의 발 밑에 지저분하게 깔리게 되었다. 

젊은 수도사는 굳건히 두 발로 서서 그들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거리를 벌려 사라지는것까지 지켜본 후에야 등을 돌렸다. 그가 작은 격전을 벌인 흙길 옆에는 부서진 수레가 있었고, 수레에는 거친 천으로 덮인 짐더미가 약간씩 들썩이고 있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한껏 숨을 죽이고 있던 ‘짐더미’는 젊은이의 발소리가 다가오자 작고 불분명한 소리를 조금씩 냈다. 수도사가 위를 덮은 천을 걷어내자 거기에는 아까의 버러지들보다 더 지저분하고 알록달록한 옷차림을 한 여자와 어린애들이 손발이 묶여 옹기종기 뭉쳐 있었다.

처음으로 재갈이 풀린 여자가 무언가 말을 하려 하자, 수도사는 손으로 이를 제지한 후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여자는 물주머니를 받아들자 제 입으로 가져가는 대신 옆에 웅크린 어린것의 입에 물려 주었다. 

차례차례로 모든 손발과 입이 주박에서 풀려나고 물주머니가 한 바퀴 돌아간 후에야 순례길에 오른 젊은 신학자 오르한 파데예프는 허리를 폈다. 약하고 천한 이들을 저열한 고통의 운명에서 구했으나 남자의 얼굴에서는 선행을 베푼 자 특유의 성취감도, 고양감도, 하다못해 우월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신이 저 평온한 하늘과 같이 핏자국과 눈물 위에 따뜻한 햇살을 그저 내려보내기만 했던 것과는 달리, 젊은 성직자의 먼지묻은 얼굴은 무심해 보일지언정 아주 지척에서 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그 얼굴이야말로 여태껏 본 어떤 성전보다 아름답더라.

 

 

 

*

 

 

 

발 밑에서 끊임없이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오르한의 가장 차갑게 식은 이성은 그가 속히 성당을 빠져나가 왕의 군대를 불러와야 함을 되새겼지만, 한편으로 눈 앞의 집시를 두고 등을 돌릴 수 없다는 것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부주교는 저 스스로를 강철로 다져 물결과 파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애썼으나, 생애 처음 마주한 불길은 쇠를 녹일 만큼 거세었다. 

“말해 보세요, 부주교님.”

실로, 바로 앞에서 들리는 집시의 노래하는듯한 목소리가 제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지 않은가.

“정말로,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기적궁의 얼굴들을 완전히 떼어 놓을 수 있으리라 믿나요?”

들끓어오른 제 피가 세차게 솟구치는 소리가 귓가에서 맥동함에도, 저 목소리의 내용이 머리 안을 태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걷는 지나친 액수의 조세와, 오로지 신을 찬미하기 위해 소모되는 그 모든 피와 땀에, 여전히 모든 이들이 무릎 꿇고 따르기만을 기대하나요?”

“당신들이...”

“이 성 바깥의 세상을 보고 다니는 것이 집시들만은 아니랍니다. 사람들은.. 그래요, 시민(citoyenne)들은! 이제 저 넓은 바다를 건너 새로운 대륙까지도 보고 왔지요. 이 세계는 어딘가에서 뚝 끊기는 절벽이 아니니까요.제가 어떻게 성서를 인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부주교님? 성서는 이미 라틴어가 아닌 언어로 쓰여져 구텐베르크의 발명품에 의해 널리 퍼져 있어요. 기적의 궁전에서도 성서를 읽는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허나 이 성당으로 저들을 이끈 것은 당신들 집시요! 흙발로 성역을 짓밟는 것은 명백한 이교의 악의적인-”

“아, 부주교님.”

붉은 입술이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이 건물의 성스러운 자격은, 당신이 직접 해제하셨잖아요.”

“공의회와 법관들의 결정은 아직 널리 선포되기 전입니다. 저는 허가서를 받은 즉시 바로 당신을 체포하러 왔고, 지금 성당에 침입한 폭도들은 그 사실을 아직 모릅니다.”

“그렇다고 성역이 아니게 된 사실은 변하지 않지요.”

“저들이 이 땅을 짓밟는 동기가 불순한 것도 여전한 사실입니다. 혹은,”

지나친 열기로 가열된 돌벽이 제 단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깨어져 나가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얀.. 얀 미치슬라브, 설마.”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부주교님. 제 친구들은 당신같은 사람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기에, 무엇이든 엿듣고 무엇이든 전해줄 수 있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예상했지요. 당신이 정정당당하게 성역을 해제시키고 체포 허가를 받아 정문으로 이곳에 들어올 것을!” 

열이, 열기가 공기를 타고 올라 아지랑이를 그려내었다. 그제서야 오르한은 코끝에 화재의 냄새가 맴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경한 일이다. 불로써 이루어지는 정화는 곧 주의 손길인것을. 그 불에 살라지며 고통받아야 하는 것들은 죄를 가진 자들이다. 그러나 지금, 정순한 성직자들이 예배를 베풀었던 장소가 불타고 있었다. 목재 골조 위에 얹힌 납판이 지나친 열기로 기이한 소리를 내었다. 

“맞아요, 제가 감옥에서 탈출해 성당으로 도망쳐 올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계획이었어요. 으음, 어쩌면 그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네요. 이 건물은 그 존재만으로 역사의 흐름을 짓누르고 있었으니-”

동강난 가고일 조각상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날아들자 청년이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그렇지 않아도 제 몰골을 잃었던 조각상은 종탑의 기둥에 부딪혀 산산조각난 돌조각들로 화했다. 부주교는 아주 잠시 그 조각상이 어디서 왔는지 멍하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자신이 그것을 집어던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야가 붉고 온몸이 떨려왔다. 그것이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분노인지, 온사방에서 고개를 치켜드는 불길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지옥불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었는데.”

 

 

 

*

 

 

 

클로팽은 다른 사람들의 머리 하나 반 정도는 위로 올라와 있는 커다란 남자를 노려보았다. 몇가지의 상징물을 감췄고 수수한 무명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지만 저 남자는 분명 성직자였다. 그것도 고위직. 기적의 궁전에 들이기에는 터무니없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수로에서 겨우 빠져나와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사이에 이곳의 법도대로 이방인을 재빨리 목매달았어야 했는데, 하필 저자의 목숨을 구하겠다고 나선 이가 얀이었다. 얀은 사내가 이곳으로 끌려오자마자 순식간에 그의 겉옷을 벗겨내 뒤집고는 근처 남의 빨래줄에 걸어버리기까지 했다. 덕분에 클로팽과 소수의 눈 밝은 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저자가 교회의 인간인 것도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희들에게 달의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마.”

“모든 들판 위를 지나는 바람이 너희에게 우호적이기를.”

“모든 바다 위를 지나는 바람이 너희에게 우호적이기를.”

“모든 산맥 위를 지나는 바람이 너희에게 우호적이기를.”

기적궁에 기거하는 노파들이 얀의 주위를 둘러싸고 중얼거렸다. 원래 한껏 차린 음식과 무수한 꽃잎, 그들이 밟아온 모든 땅의 노랫말과 춤을 곁들여야 하건만, 지금은 그럴 수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저 노인들도 명목상 ‘너희’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멀뚱히 서 있는 남자에게 다가갈 기색도, 가까이 불러들일 생각도 없지 않은가. 떠돌이들의 원로들이 고개를 살짝 숙인 청년의 머리에만 방금 만들어진 수수한 화관을 씌웠다. 

얀이 천연덕스레 그들에게 선언하지만 않았어도 교회 문짝만한 저 남자는 이미 발끝이 땅에서 떠 있었을테다.

 

“자, 이거 받아요.”

“이게 무엇입니까?”

얀이 특이한 모양의 매듭이 묶인 작은 장식품을 건네었다. 의미를 말해주면 눈 앞의 남자는 분명 이교의 미신이 담긴 물건이라며 거절하겠지. 그래서 대답은 아주 실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이곳 사람들에게 외부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공격 당하는 일은 없을거에요.”

“..일종의 증명 같은 것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목에 걸 수는 없습니다.”

“꼭 눈에 띄는 곳이 아니어도 그냥 몸에 지니고만 있어요.”

오르한은 소재를 알 수 없는 작은 조각과 가죽끈, 구슬로 이루어진 장신구를 얼마간 들여다보았다. 신성모독적인 상징이나 문자가 있는지 살피는듯 했다. 이내 별 문제 없다고 판단했는지 품 안으로 집어넣었지만.

“그리고 웬만하면 이 안에서는 저와 같이 다녀야 해요.”

“저는 이제 바깥으로...”

여느때와 같이 즉각적이고 딱딱하게 나오던 대답이 잠시 끊겼다. 얀은 부주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정도 읽히는듯 해, 그저 웃으며 제 할 말을 했다.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잠시 여기 있으면서 기운을 좀 차리는게 좋을걸요. 사마리아 인의 물동이를 굳이 거절하고 싶은가요?”

아마 집시가 성서의 내용을 인용한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오르한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가 이내 평소의 얼굴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잠시 동행하겠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에 아이들이 웃으며 종종 꽃송이를 뿌려줬다. 얀은 어린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비록 길가나 들판에 나는 흔한 꽃이었지만, 걸음 앞에 뿌려지는 꽃이란 종류를 불문하고 축복을 의미하는 법이다. 그 외에도 붙임성이 좋은 젊은이들이 작은 양의 주전부리 등을 쥐여주고 갔다. 올리브빛 피부를 가진 어떤 처녀는 심지어 오르한의 손에까지 말린 과일을 들려주고 수줍게 물러났다. 오르한이 그것을 손에 들고만 있자 얀이 속삭였다.

“먹어요. 손님을 위한 꾸밈없는 호의에요.”

그러고는 자신도 말린 대추야자를 입에 넣었다.

잠시 정복을 벗어둔 성직자가 말린 무화과를 입에 넣는 것을 보고, 얀은 자연스러운 척 길가 주변의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그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상대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은 태양처럼 따뜻했고, 살이 닿는 순간 조금 어색한듯 뻣뻣해졌으나 얀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머리 위에 얹힌 화관에서는 싱그러운 풀냄새와 함께 단 향기가 풍겼고, 얀은 그 냄새를 맡으며 옆의 남자에게도 그 향기가 닿을지 궁금해졌다. 아니, 조금은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직접 깎아 만든 피리소리에 맞춰 노래하는 어린애들의 목소리도 들렸으면. 실을 엮어 알록달록한 무늬의 천을 짜고 있는 사람들의 집중한 얼굴이나, 제 손이 과즙으로 젖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사과를 수저로 파서 옆의 노인에게 먹이고 있는 청년을 보았으면. 오래전 떠나온 땅에서 들은 노래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맴돌았다. 

 

기사님, 기사님. 저와 결혼하지 않겠어요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세요

예, 아니오 라고만 대답하시면 된답니다

당신에게 새로 지은 튜닉을 드릴게요

입기에 제법 호화스러울 거에요

바늘과 실을 써서 이어붙인게 아니라

가장 하얀 비단으로만 짠 옷이랍니다

(*Garmarna - Herr Mannelig)

 

 

 *

 

 

석양이 모두 가셨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둡게나마 푸른 빛을 뜨고 있었다. 이제 붉은 기운은 머리 위가 아닌 발 밑에서부터 넘실대었다. 달이 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불타는 성당의 종탑 위에 서서 얀 미치슬라브는 쓰게 웃었다. 이 쓴웃음은 그에게 아주 익숙한 모양이라서, 이제 입술과 뺨이 움직이는 형태를 스스로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을만큼 이었다. 

이틀 전, 이 성당으로 숨어들어 올 때도 얀은 그렇게 웃었다.

사흘 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을때도 얀은 그렇게 웃었다.

몇 주 전, 광인들의 축제에서 흰 말을 타고 광장 가운데로 걸어오던 부주교를 봤을때도,

그 전에 오르한 파데예프가 도시의 부주교로 임명되었을때도,

훨씬 전에 오르한이 엄격하며 냉철한 어떤 이단심문관의 이름인 것을 알게 되었을때도,

그보다 한참 전에….

 

“오르한, 저도 당신에게 몇 번이고 기회를 주었어요.”

불의 비가 내리는 와중, 얀은 문득 오르한의 얼굴을 만지고 싶어졌다. 그러나 성당을 불태운 군중들은 도시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권력자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성난 사람들도, 그에 쫓기는 이들도 성서의 구절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신실한 부주교, 이단심문관인 남자가 늘상 읊던 경전이 이 순간 얼마나 거짓같은지. 그럼에도 그 몸에 걸친 정복과 상아로 만든 묵주가 가지는 무게가 얼마나 무자비하게 모든 것들을 발아래에 두었는지. 얀은 영원히 그 삶을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언젠가, 우리가 더 지혜로워지고, 세상이 더 성숙해지고, 언젠가 우리가 서로 각자의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할게요. 우린 아직 그런 삶을 살지 못하기에.”

얀은 천천히, 종을 울리게 하는 굵은 밧줄들을 쥐었다.

“다만 제 기도는 저 하늘에 그대로 계실 아버지가 아닌, 땅 위에 널린 귀여운 아이들과 못된 신민과, 세상의 모든 신기하고 지긋지긋하고 악하며 약한 것들을 향할거에요. 그러니 당신만 불길에 휩싸이는게 아니랍니다.”

무게가 실린 성당의 종들이 일제히 큰 울림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오르한이 머리를 두드리는 소리에서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었지만 얀은 이미 불꽃 너머로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를 사람의 목소리 같지 않은 절규가 채웠다.

이내 종소리에 묻혀 사라졌지만.

 

 

*

 

 

불길에 살라먹힌 성당은 단단한 납판이 녹아 흘러내리고 돌들이 열기를 못견디고 터져나가, 앙상한 골조만 남게 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왕의 군대가 군중들을 해산시켰지만, 폭동을 주도했다고 보고된 집시들과 파리의 시민들을 구분하여 체포하는데 한참동안 어려움을 겪었기에 처벌은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 분노한 폭도들의 기세를 생각하면 놀랍지만, 그날 밤에 죽어 발견된 시신이 한 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집시들이 그 악명 높은 이단심문관을 붙잡아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수군거렸지만, 어느새 도시의 생활에 충분히 섞여들기 시작한 그들은 이미 많은 이들의 이웃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부주교는 그 소동이 있고 며칠 후에 다시 얼굴을 보였다는 소식이 돌았으니, 그에 관련한 소문도 잿가루처럼 흩어졌다.

 

오르한 파데예프는 집시들의 무리와 마주쳤을때 자신의 끝을 마주했다 생각하였다. 이미 자신이 데려온 병사 몇이 어디로 갔는지도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조그맣게 머리 뒤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 악마의 교활한 계략에 처음부터 끝까지 놀아난 자신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끝없는 코퀴토스임에 틀림 없을테니까. 부주교는 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할 것이라 여겨 차분히 절망했다. 불타는 대성당은 그 절망에 썩 어울리는 배경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집시들은 오르한의 품에서 얇은 돌과, 가죽매듭과, 구슬이 엮인 물건을 꺼내들더니,

그대로 부주교를 놔두고 떠났다.

“당신, 바람의 자식중 하나와 결혼하였군!”

 

그들이 남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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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정보
출연
​젲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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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미치슬라브
Jan Mieczysław
손님, 잉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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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데예프
Orhan Fade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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