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트루스의 눈 앞에 펼쳐진 건,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풍경이었다.
연말의 뉴욕. 트루스와 글로나스는 미리 예약해둔 현대미술 전시를 관람하고,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 시간을 보냈다. 이후 귀가해 각자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거실창 밖으로 주홍색 불빛들이 어른거리는 풍경이 보였다. 크리스마스 풍으로 꾸며놓은 것이다. 로맨틱한 광경을 비추는 창가 옆에는 옥션에서 시킨 트리 소품이 집 한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그린듯한 이상적인 홀리데이 주간의 모습이었지만...
그 따뜻한 집에 글로나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첼?"
트루스는 금방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침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첼? 안에 있나?"
그를 호명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문 틈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새어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트루스는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와 동시에 뺨을 문 표면에 가져다 댔다. 얼어붙을듯한 냉기가 그의 볼을 두드렸다. 변성 사건일까. 그는 빠르게 판단했다. 정말 떨쳐낼 수 없군. 그리고 생각했다.
트루스는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첼. 방 안이 추운 것 같군. 걱정되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트루스는 하는 수 없이 강제성을 띈 내용을 담아 다시 물었다.
"문 따고 들어가도 되나?"
그제야 글로나스가 반응했다.
"……안, 안됩니다. 상사님. 안 추워요."
차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명백한 거짓말임을 둘 다 알 수 있었다. 트루스는 조금 타이르듯 말했다.
"그래? 그럼 우리 오늘은 따로 자나?"
"당분간은요."
"진짜? 나 베개 안고 잔다?"
"그러십쇼..."
"뽀뽀도 한다?"
"…예."
"정말?"
"……." 글로나스는 답이 없었다. 이 지점에서 트루스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보통 이쯤 싫다고 할 텐데. 정말 무슨 일이 생기긴 했나보군. 트루스는 벽 쪽으로 좀더 가까이 붙어 말했다.
"변성 사건인가?"
글로나스는 순식간에 자백하는 심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업무적인 태도로 나오니 오히려 답하기 쉬웠다.
"그런 것 같습니다..."
"상황은?"
"……제가 엘사가 됐습니다."
"엘... 음?"
"겨울왕국이요."
글로나스의 말에 트루스는 화려한 그래픽으로 점철된 디즈니의 화면을 떠올렸다. 얼음 결정이 반짝이는 창가나, 푸른 색채로 뒤덮인 방 안의 풍경을. 그곳에 외롭게 앉아 있을 글로나스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당장이라도 방문을 열고 글로나스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글로나스의 말이 빨랐다.
"상사님까지 얼려버릴까봐 무섭습니다."
트루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괜찮아. 장갑을 끼면 되잖아. 엘사처럼."
"자다가 벗겨지면요. 장갑까지 얼려버리면요."
글로나스의 우울이 깊었다. 굳은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을 듯했다...
"그래도..."
"상사님은 추위를 많이 타시잖아요."
"첼."
"저는 괜찮습니다."
"……."
"네가 없으면 외로움도 많이 타."
"……."
트루스는 초라하게 고백했지만,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글로나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만약 반대의 입장이라면 트루스 역시 글로나스처럼 행동했을 테다. 사랑하는 사람을 해칠까봐 두려우니까. 그게 외로운 것보단 나으니까. 나보단 그가 더 중요하니까. 그만큼 좋아하니까. 그러나 그런 글로나스의 알면서도 트루스는 문을 두드리길 선택했다. 같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이 외로울까봐. 그게 내가 다치는 것보다 낫고, 나보단 그가 더 중요하니까. 그만큼 좋아해서...
Knock, Knock Knock, Knock.
"같이 눈사람 만들까?"
트루스가 방문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그 소리에 방 안에 있던 글로나스가 문가로 다가왔다. 그 기척은 트루스에게까지 느껴졌다. 글로나스는 조금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미워요..." 트루스는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꽁꽁 얼어버려 빠지지 않는 아이스크림을 녹여먹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게 아니면…”
트루스는 유튜브의 동영상을 재생했다. 그러자 라장조의 유쾌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베이스 기타의 현이 리드미컬하게 튕겨지고,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입모양에 맞춰 트루스가 입을 열었다.
"음. 혹시 정신 나간 소리 좀 해도 될까?"
글로나스에게도 익숙한 도입부였다. 그는 하릴없이 한숨쉬며 답했다.
"상사님은 원래도 가끔 정신 나간 소리를 하십니다."
"내 인생은 언제나 닫힌 문 뿐이었지."
"그러다 마침내 널 만나게 된 거야."
"저도 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상사님도 아시죠. 제가 오래 자리를 찾아 헤메다가..."
"통제국에 입사한 걸요."
그 '자리'가 죽음이 가까운 자리라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둘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만요. 이젠 달라요."
"서로를 만나서."
"처음으로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지."
"처음으로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죠."
Love is open door, Love is open door.
Love is open door, with you, with you, with you…….
핸드폰 속 두 남녀는 명랑한 목소리로 듀엣했다. 하지만 트루스와 글로나스는 그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침묵했다. 벽을 사이에 둔 채 각자의 마음을 억누르는 밤. 사랑은 열린 문이라지만, 사랑해서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는 두 사람은 쓸쓸하게 문에 기대 얄팍하게 느껴지는 서로의 체온을 느낄 뿐이다.
…….
"... 첼."
먼저 호명하는 건 트루스였다.
"... 네."
그는 질문했다.
"외롭나?"
"... 네. 상사님도요?"
"응. 문 틈으로 손가락 넣어서라도 잡고 싶을 만큼."
"손가락 끼십니다."
글로나스는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답했다.
"대수냐고."
"상사님이 다치는 건 싫어요. 저희 집을 얼려버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여전히 완고한 글로나스의 말에 트루스는 오래 골몰했다. 스스로와 타협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내놓은 답은...
"……같이 자자고는 안 할게."
"……."
"문만 잠깐 열어줘."
"안아주고 싶으니까."
"춥잖아."
"니가 아는 것중에 제일 따뜻한 건 나고."
"그러니까... 첼."
"나를 들여보내줘."
트루스가 애걸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문이 열렸다. 단숨에 한기가 트루스의 온몸으로 들이닥쳤다. 덜 말린 머리카락의 끝이 삽시간에 굳었지만, 트루스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달려가 조금 식은 글로나스의 몸을 꽉 안았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매끄러운 얼음으로 뒤덮인 방. 트루스는 장갑을 낀 글로나스의 손을 그대로 비비듯 문질러 잡았다. 뜨거운 숨을 목 근처에 내뱉었다. 글로나스는 아슬아슬하게 버텨온 댐이 무너지듯 힘없이 그에게 안겼다. 두 사람은 오래 포옹한다...
하지만 껴안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변성 사건은 고작 포옹으로 해결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트루스의 몸이 고열로 펄펄 끓는 상태가 아닌 이상, 그의 몸 역시 금방 서늘해질 것이다. 가깝게 안은 몸은 금방 벌벌 떨리게 될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스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포기하지 않았던 건... 사랑은 문을 여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