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데리고 나가주시겠어요?”
왕자는 놀란 듯 눈을 깜빡인다. 마주한, 꿈을 꾸듯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는 넓게 펼쳐진 하늘과도 같다. 곧 그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바란다면 얼마든지.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탑 위의 외로운 공주는 자신을 뒤흔드는 어떤 사랑에 뛰어들어보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곧 자유를 건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나 푸르른 상록수 숲 가운데에, 위험을 아는 자라면 함부로 발 들이지 않는 가시나무 덤불과, 높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탑이 하나 있었다. 마녀가 살고 있다거나, 커다란 뱀 괴물이 살고 있다거나, 외눈박이 거인이 있다거나. 수많은 소문들이 덤불을 둘러싸고 있지만 누구도 진실을 아는 자가 없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진실 하나는, 탑 안에 사는 것이 마녀도, 뱀 괴물도, 거인도 아닌 그저 평범한 소녀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좋냐는 거예요!”
탑 아래를 내려다보며 발을 동동 구를 때마다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머리카락이 나풀거린다. 매끄럽게 빛나는 색은 근사한 붉은 빛이다. 평범한 사람치고는 놀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이기는 했다. 그러나 본인은 그저 평범하다고만 여기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발로 머리카락을 치워낸 탑 위의 소녀―메이카는 연신 창문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탑 위까지 울려 퍼진다. 어디서나 어린 아이의 소리만큼은 멀리도 퍼져 나간다는 명제가 당연했다. 아아, 아무리 길을 잃었어도 그렇지, 여기까지 와버린 건 정말 큰일이라니까요! 탑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소녀는 마냥 발을 동동 구르기만 한다. 가시에 찔리면 무척이나 아프답니다, 어쩌면 동화 속 공주님처럼 영원히 잠들어버릴 지도 몰라요…….
“둘 다 찾았다.”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 게 바로 그 때였다. 무성한 가시덤불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던 아이 둘을 번쩍 안아 올리는 손길이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은 퍽 안심한 표정으로 다시 울음을 터트리며 그 팔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메이카는 창문틀에 몸을 바짝 숨기고 다정한 말투를 가진 사람이 저 멀리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하늘처럼 파란 눈동자는 그 비유처럼 넓디넓게 집요하다.
숨죽인 지도 한참, 두 아이를 안아 올린 사람은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야 메이카는 갑작스럽게 벌떡 일어나더니 우당탕 책장 앞으로 뛰어 들었다. 분명 본 적이 있어요! 혼자서 쫑알거리는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책장에서 온갖 책을 집어 꺼내던 그는 곧 찾던 책을 펼쳐내었다.
“드래곤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해주는 다정하고 용감한 왕자님! 분명 그분께서도 왕자님인거겠죠?”
동화책의 삽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금발과 푸른 눈동자의 망토를 두른 왕자님.
“음, 머리색은 다르지만.”
그 분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셨지. 그것도 무척 다정한 느낌이라 멋있기만 했다!
“눈 색도 다르지만.”
하지만 자신이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니 조화를 따지면 전혀 문제없었다.
“망토도 안 두르셨지만…….”
망토야 두르면 그만 아닌가! 메이카는 동화책을 끌어안은 채 바닥에 풀썩 드러누워 버린다. 붉은 머리카락이 온통 파도치고 있었다. 또 와주시지 않을까. 이 탑을 감시하는 드래곤은 어디에도 없지만요. 거대한 드래곤은 방해물인 동시에 알림판이기도 했다. 소녀에게는 그것이 없다. 그렇기에 남아있는 것은 옅은 기대와 체념이 동시에 담긴 혼잣말뿐이다.
잠깐의 꿈같던 환상은 스러지고 탑 안에서의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어가고 있었다. 푸른 낮이 붉은 노을로 물들어가는 것처럼 기대는 곧 실망으로 물들어가기만 한다. 붉은 하늘이 어둠으로 가라앉아가는 그 시간. 메이카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저 눈을 깜빡인다. 귓가에 옅은 새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찰나였다.
어떻게 올라온 건지 창틀에 몸을 기대고 있는 작은 새가 있었다.
“어머나!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나요?”
날개를 파닥거리며 힘들어하는 새를 손 위에 올려준다. 두 손에 꼭 맞을 정도로 자그맣다. 물을 드릴까요? 새가 언뜻 고개를 끄덕인 것도 같았다. 후후. 먹이도 필요하신가요? 이번엔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이리도 똑똑하실까! 적막한 탑 위의 생활에선 고작 작은 날갯짓 하나로도 기뻐지고 만다.
메이카는 새를 푹신한 베개 위에 올려주고, 물을 따라준다 먹을 만한 걸 찾아준다 한참이나 부산이었다. 얕은 그릇에 뿌려준 곡식을 열심히 받아먹던 새는 통통해진 배를 부여잡고 고로롱 잠에 빠져든다. 그 목덜미에 매달린 종이쪽지를 발견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혹시 주인이 있는 새인 걸까, 풀어 살펴봤지만 간단한 지명만이 적혀있는 쪽지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 베개 위로 자신도 턱을 올리며 메이카는 고민에 빠져든다.
다정한 목소리. 새 울음소리. 그리고 다시 목소리. 일련의 소리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방법이 있을까? 무언가의 이름이 들려오면 메이카는 벌떡 일어나 창문에 가까이 붙었다. 자신의 왕자님은 언제나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만 같다.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잠들어있던 새가 날개를 파닥거린다. 혹시 왕자님이 찾는 게 새님이신가요? 새가 고개를 끄덕인다. 날아서 내려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이번엔 모른 척. 그러면 어쩌면 좋죠?! 새는 대답이 없다.
목소리는 금방 멀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메이카는 한껏 용기를 끌어 모은다. 창문틀에 거의 매달리듯이 붙었다.
“새님은 이 위에 있답니다!”
누군가에게 들릴 것이라 상정한 발화는 지나치게 오랜만이었다. 큰 소리로 외치자마자 얼굴이 붉어진다. 심장이 크게 뛰는 것도 같았다. 잠시 후에 아래에서 대답이 돌아온다. 확실히 닿을 만큼 아주 큰 소리였다.
“올라가도 될까?”
“자, 잠시만요!”
우왕좌왕하던 메이카는 급히 바닥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끌어 모아 땋기 시작했다. 탑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가시덤불에 찔려 크게 아프고 말 터였다. 끝까지 땋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는데, 그때엔 이미 아래가 조용하다.
“계신가요……?”
“이제 올라가도 돼?”
“네, 네!”
붉은 밧줄이 창문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탑 아래에서 그것과 마주한 왕자님―나기는 의아하게 그것을 쥐었다. 덕분에 좀 더 안전하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손 안에 와 닿는 감촉이 지나치게 매끄러운 탓이었다. 곧 의아함을 지운다. 소중한 친구이자 전서구가 저 위에 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발을 딛고 탑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때쯤, 머리카락을 단단히 고정시켜둔 메이카는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첫 인사를 연습하고 있었다. 안녕하시와요, 평안하신가요, 반갑습니다……. 대체 공주가 왕자님과 마주한 첫 순간에는 무슨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요?! 동화책에도 그런 건 나오지 않는다고요! 울상을 지으며 책장을 뒤지는 손길이 다급하다. 끝내 인사말을 정하지 못했는데, 누군가 턱 하고 창틀에 손을 짚으며 올라온다.
햇빛이 뒤에서 비쳤기 때문에 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밧줄 내려줘서 고마워.”
“처, 천만이랍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첫 만남을 완전히 바보 같은 말로 시작해버리고 말았다. 바라던 동화책 속의 한 장면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떨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여기서 처음으로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즉, 이야기의 시작이었다.